[NYT] 위안부 첫 증언 김학순 할머니를 조명한 뉴욕타임즈 'Overlooked No More: Kim Hak-soon'
안녕하세요! 하로아입니다.
얼마 전에 뉴옥 타임즈에서 'Overlooked no more'라는 과거에 사망했지만 당시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던 고인들의 이야기를 담는 부고 시리즈에서 위안부에 대한 첫 증언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에 대한 기사가 싣렸습니다. 미국 대형 신문사에서 이렇게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참 의미가 있었는데요.
오늘은 해당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여 해석해 보았습니다. 위안부와 관련된 영어 표현도 많이 나오니 많은 분들께서도 같이 공부해 보시고,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Overlooked No More: Kim Hak-soon, Who Broke the Silence for ‘Comfort Women’
By Choe Sang-Hun
더 이상 간과되어선 안 된다 : '위안부'의 침묵을 깨뜨린 사람, 김학순
Her public testimony about the horrors of sexual slavery that Japan had engineered for its World War II military encouraged other survivors to step forward.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에서 자행했던 성노예에 대한 그녀의 공개 증언은 다른 생존자들로 하여금 대중들 앞에 나서도록 이끌어 냈습니다.
This article is part of Overlooked, a series of obituaries about remarkable people whose deaths, beginning in 1851, went unreported in The Times.
해당 기사는 1851년부터 시작되어 그동안 타임즈에 보고되지 않았던 저명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는 부고 시리즈, '간과된 사람들'의 일부입니다.
SEOUL — On Aug. 14, 1991, a woman who lived alone in a flophouse here faced television cameras and told the world her name: Kim Hak-soon. She then described in gruesome detail how, when she was barely 17, she was taken to a so-called comfort station in China during World War II and raped by several Japanese soldiers every day.
199년 8월 14일 서울, 한 쪽방촌에 혼자 살고있던 여인이 TV 카메라를 마주하고 그녀의 이름은 김학순이라고 세상에 알립니다. 뒤이어 그녀는 제 2차 세계 애전이 일어날 동안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녀가 거의 17살이 되던 어느 날, 중국에 있던 그녀는 '군 위안소'라는 곳에 끌려가 매일 여러명의 일본인 군인들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It was horrifying when those monstrous soldiers forced themselves upon me,” she said during a news conference, wiping tears off her face. “When I tried to run away, they caught me and dragged me in again.”
"그 무시무시한 병사들이 나에게 강요했을 때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녀는 한 언론사 컨퍼런스에서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 했습니다. "도망을 가려고 했었지만 그들은 나를 다시 잡아 집어넣었습니다."
Her powerful account, the first such public testimony by a former “comfort woman,” gave a human face to a history that many political leaders in Japan had denied for decades, and that many still do: From the 1930s until the end of the war, Japan coerced or lured an estimated 200,000 women into military-run rape centers in Asia and the Pacific, according to historians. It was one of history’s largest examples of state-sponsored sexual slavery.
과거 "위안부"로서의 첫 공개 증언이자 그녀의 호소력 있는 이야기는 많은 일본 정치인들이 지난 몇 십년 동안 부인해 왔으며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부인하고 있는 역사를 사람들이 직면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940년대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약 20만 명의 여성들을 꾀어 내거나 강제로 군에서 운영하는 강간 센터에 잡아 들여왔습니다. 이는 역사상, 국가에서 운영하는 가장 큰 규모의 성노예 사례 중 하나였습니다.
Kim died of a lung disease when she was 73, on Dec. 16, 1997, just six years after the testimony. But she left a long-lasting legacy and inspired other former sex slaves to come forward in Japan, the Philippines, Indonesia, Malaysia, China, Australia and the Netherlands.
김씨는 1997년 12월 16일, 73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숨졌습니다. 그녀의 첫 증언 후 6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오랜 시간동안 남아있을 유산과 함께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호주 그리고 네덜란드에 있었던 다른 성노예 피해자들로 하여금 용기를 내도록 영감이 되었습니다.
“On days when the soldiers returned from expeditions, we each had to take as many as 10 to 15 men,” Kim said on South Korea’s KBS-TV in 1992. “They took us as if we were some kind of object, and used us however they wanted. When we broke down with problems like diseases, they abandoned us like objects or killed us.”
"군인들이 탐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날이면, 우리는 10명에서 15명 까지의 남자들을 상대해야 했어요." 199년 남한의 KBS TV쇼에서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무슨 물건 취급하듯이 대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용했어요. 우리가 병에 걸리면 물건 버리듯 버려 버리거나 죽여버렸죠"
By 1987, Kim was living in a slum, subsisting on welfare handouts and working temporary jobs like sweeping parks. In 1991, she heard news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denied having recruited comfort women, and she contacted a women’s rights group.
1987년에 김씨는 빈민가에 살면서 복지 지원금과 청소 노동자 같은 계약직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91년, 그녀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를 모집하지 않았다며 사실을 부인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성 인권 단체에 접촉했습니다.
At the time, in a culture in which female victims of sexual violence were expected to live in shame and silence rather than seek redress, most former comfort women concealed their past.
과거 당시에는,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은 일을 제대로 바로 잡기보다는 수치심과 침묵 속에서 사는 것이 사회 분위기 였으며, 대부분의 위안부 여성들은 그들은 그들의 과거를 숨겼습니다.
“I wanted to protest to the Japanese people, ‘You say nothing like that happened, but I survived all that and am living evidence that it did,’” she said in 1991.
1991년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일본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어요, '너희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살아있는 증거 그 자체라고요.'"
Since 2018, South Korea has celebrated Aug. 14 — the day Kim made her first testimony — as a national memorial day for former comfort women.
2018년 이후로, 남한은 김씨가 첫 증언을 했던 8월 14일을 위안부의 날로 지정하였습니다.
For the rest of her life, Kim campaigned tirelessly, demanding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take legal responsibility for sexual slavery and offer compensation. But she died with her wish unfulfilled.
그녀는 여생에서도 끊임없이 싸웠고, 일본 정부에게 성 노예에 대한 법적 책임과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눈을 감았습니다.
In her last interview, with the online newspaper Newstapa, Kim said she was trying to live on — “to be 110 or 120, if I have to.”
뉴스타파라는 온라인 신문사에서 진행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녀는 110살, 120살이 되더라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I wanted to speak out before I died because no one else would on my behalf,” she said. “I have no desire left other than to hear them say they are truly sorry.”
"내가 죽기 전까지도 계속 용기 내어 말 할 거에요. 안 그러면 아무도 나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과하는 것을 듣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어요."
※ 오늘의 단어
overlook : 못 보고 넘어가다, 간과하다.
sexual slavery : 성노예
obituary : 사망 기사
flophouse : 쪽방촌, 싸구려 모텔
gruesome : 섬뜩한, 소름끼치는
comfort station : 위안소
monstrous : 괴물같은 / 무시무시하게 큰, 거대한
account : 설명 (이야기, 말)
coerce : (협박하여) 강압하다. 강제하다.
lure : 꾀다, 유혹하다.
expeditions : 탐험, 원정
subsist : 근근히 살아가다 (먹고 살다), 생존하다. 생활해 나가다
welfare handouts : 복지 지원금, 국가 보조금
redress : 보상, 배상 / 시정하다, 바로잡다
conceal : 감추다, 숨기다